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첨해 이사금 (문단 편집) == 생애 ==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왕(助賁王)의 친동생이다.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 >원년(서기 247) 가을 7월, 시조묘에 참배하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봉하였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즉위하고 두 달 만인 247년 7월에 아버지 석골정을 세신 [[갈문왕]]에 봉했다. 그런데 [[신라]]에 [[시호]] 개념은 [[진흥왕]](제24대) 때나 들어오는지라 이전까지 모든 갈문왕명은 물론, 왕명은 모두 실명+이사금/갈문왕의 형태였다는 점에서 '''별도의 [[시호]]를 부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만약 '세신'이 음차가 아닌 훈차라면 '''세상의 신'''이라는 뜻이 되는데 사실일 경우 [[반인반신|자신을 신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례 이사금]](제14대)을 [ruby(世, ruby=누)]리지 이사금이라고도 하고, [[혁거세 거서간]]의 이름이 [ruby(赫, ruby=붉)]어[ruby(世, ruby=뉘)]로 해석되는 걸 보면 '세'(世)는 음차가 아닌 훈차로 쓰인 것이 맞는 듯 하다. >사관이 논평한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생부를 친(親)이라 하고 시호를 '도'(悼)라 하며, 생모를 '도후'(悼后)라 하여 제후나 왕의 지위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이는 경전의 뜻에 맞는 것으로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임금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니,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亦有之 此 非禮 固不可以爲法也 같은 석골정의 아들인 조분 이사금은 아버지 골정을 갈문왕에 봉하지 않았다. 이는 조분이 골정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촌 [[내해 이사금]](제10대)의 [[사위]]로서 [[왕위]]를 상속했음을 의미한다. 형 조분은 아버지를 갈문왕에 봉할 필요가 없었고, 동생 첨해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조분의 사후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사람은 조분의 동생 석첨해, 아들 [[유례 이사금|석유례]], 맏사위 [[석우로]], 둘째 사위 [[미추 이사금|김미추]]였다. 석유례, 석우로, 김미추는 석조분보다 한 항렬이 낮지만 석첨해는 석조분과 항렬이 같았고, 그렇다면 석첨해가 석유례, 석우로, 김미추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유리 이사금]](제3대)의 유언에 따라 아들들과 사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석첨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첨해는 군주의 아들이나 군주의 사위가 아니었기에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추증한 것이고, 형 석조분은 이미 내해 이사금의 사위였기에 그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고려]] 왕조의 관점에서 논평한 것으로 [[벌휴 이사금]]은 즉위한 후 아버지 석구추를 별도로 추봉하지 않았고, 석이매의 아들인 [[내해 이사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첨해 이사금이 부친인 석골정을 추봉한 것은 아버지여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고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초기 신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호]] 개념이 적용된 명칭이라 단순한 추봉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전형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 첨해 이사금 즉위 초기에 있었던 명장 [[석우로]]의 죽음에는 매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최고의 [[왕족]]인 석우로가 [[일본|왜]]의 사신에게 >"너희 왜의 임금을 붙잡아다 [[소금]]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밥]]짓는 노비로 삼겠다." 는 말을 술김에 한 탓에 분노한 왜군이 쳐들어와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을 갈 정도로 신라군이 패배했고 이에 석우로가 실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왜군 진영에 별다른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가서 [[사과]]를 하는데 왜에서는 석우로를 붙잡아다 [[화형]]시켰다고 한다. 왜군들이 석우로를 붙잡아다 장작에 올려놓고 태워 죽여서 아주 재로 만들어버렸는데 신라의 병권을 책임졌던 장수에다 왕위에 매우 가까웠던 최고 석씨 왕족이 왜군 진영에 단신으로 갔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는데도 문제는 첨해 이사금이 왜에 대해 따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첨해 이사금은 군공 등 [[업적]]이 뛰어나고 힘도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크며 왕위 계승권 측면에서도 자기보다 [[정통성]]이 높은 석우로가 왜인이라는 제3자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다른 문제로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님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데서...(중략)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 왕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와 신라인이 공모하여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라고 되어 있다. 문제는 왜군이 신라를 쳐서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간 것을 '''출거'''(出居)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이 패전했거나 상황이 열세에 몰리자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을 갔고, 석우로가 개전의 책임을 지고 [[살해]]당했을 수 있다. 《일본서기》기록에서는 '신라 왕'이라 적혀 있으나 석우로의 [[지위]] 이후[* 당시 석우로의 지위는 최고위직인 '서불한'([[이벌찬]])에 왕족이자 선왕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다.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갈문왕의 칭호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미루어보면 기록에 안 남아있을뿐 석우로도 왕의 칭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일본]] 측에서 왕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기록의 유사성으로 보아 실제로는 석우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첨해 이사금 때의 일은 아니고, 다음 왕 [[미추 이사금]](제13대) 시대의 일화지만 석우로가 왜인들의 손에 살해당한 후 석우로의 아내와 아들이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을 때 [[술]]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경주시|금성]]을 포위했다가 소득없이 돌아가기도 했다. 첨해 이사금의 재위 기간은 14년 정도인데 신라의 초기 왕치고는 짧은 편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기근이 심해서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비]]가 내릴 때는 또 큰 비가 내려 [[산]]이 40군데나 무너졌다는 기사도 있다. [[외국]]과의 관계에서, 선왕 조분 이사금 때 최초로 맞붙었던 [[고구려]]와는 일단 사신을 보내 화친했다. 그러나 [[백제]]와는 자주 충돌했는데 즉위 9년(255년)에 백제가 변경에 침입했지만 격퇴했으며 즉위 15년(261년)에는 달벌(현재의 [[대구광역시]])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다만 백제 충돌 및 달벌성 구축은 고고학적 분석 결과로 인해 기년 자체는 정면 부정된 상황이다. 일단 서기 255년 백제는 겨우 한강 유역이나 추스르는 단계로 경기도도 아직 제패하지 못하고 허덕이던 단계였기에, 백제가 충북 일대 진한 혹은 신라 변경에 침입하려면 [[목지국]]을 수장국 자리에서 끌어내린 기원280년대 이후에서나 가능하다. 한편 달벌성 구축은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이 유력한데, 일단 《삼국사기》 신라 관련 기록은 후대 임금들 기록을 가져다가 앞선 임금들에게 갖다붙인 게 많은 걸로 의심되는 초기 백제 관련 기록과는 달리, 기년만 문제 있을 뿐 해당 임금들에게 배치된 기사들의 신빙성 자체는 높게 평가된다. 때문에 첨해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은 고고학적으로 [[진한]] 일대에 대한 장악력이 이전 시기보다 꽤 높아지는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경주 월성]]의 남쪽에 따로 남당(南堂)을 세우고, 정사는 여기에서 보았다고 한다. 한편 부도(夫道)라는 사람이 집이 [[가난]]했지만 아첨하지 않고 글쓰기와 계산을 잘 해 그에게 [[왕실]] 보물 창고인 물장고(物藏庫)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겨울 12월 28일, 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 《[[삼국사기]]》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사망]] 기사에서 '왕이 죽었다[王薨]'라고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이후 '왕의 시호를 뭐라 정했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첨해 이사금은 굳이 >'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王暴疾薨]'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로 [[돌연사]]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 왕이 본인의 사위가 아니라 형 조분 이사금의 사위인 김미추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석우로가 왜군에게 잡혀 화형당해 죽도록 방치하고, 왜국에 별달리 항의나 보복하려고 하지도 않은 첨해 이사금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분개한 석씨 왕족과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던 김미추가 힘을 합세해 [[반정]]을 일으켜 첨해 이사금을 제거했다고 보는게 학계의 유력한 해석이다. 아니면 왜와 백제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 첨해 이사금의 책임론이 부각되어 이를 근거로 원래 조분 이사금 사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김미추 등의 [[김(성씨)|김씨]] 계열이 반정을 주도했을 여지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